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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모르는 터미네이터
요즘도 밤 10시까지 크렘린 집무
모스크바=권경복 특파원
지난달 초 반기문(潘基文) 유엔 차기 사무총장이 크렘린을 방문했다.
반 차기 총장의 얼굴엔 시종 미소가 끊이질 않는데, 푸틴 대통령 표정은 딱딱했다.
러시아 기자가 내게 말을 건넸다.
“저게 진짜 푸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터미네이터(terminator) 외교’라고 부르죠.”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목석(木石)같은 표정으로 사명 완수에만 몰두한다.
2007년은 푸틴이 일할 수 있는 마지막 해다.
2004년 재선(再選)된 그의 임기가 2008년 3월 끝난다.
3선은 헌법으로 금지돼 있다.
임기 말 재선대통령은 으레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을 겪기 마련이지만, 푸틴은 다르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81% 지지율을 기록했다. 현재 세계 지도자들 중 최고 수치다.
이런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업은 푸틴은 2007년에도 러시아의 터미네이터로 자처하려 하고 있다.
푸틴은 10월 25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어느 나라든 지도자의 성공 혹은 실패는 경제에 달려 있다”고 했다.
집권 7년간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6~7% 기록,
국내 총생산은 1999년 1865억 달러에서 2006년 8300억 달러로 성장,
외환보유고는 1999년 280억 달러에서 2669억 달러로 10배 증가….
그런데도 푸틴에겐 여전히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다.
오일 머니를 첨단산업에 투자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기본이다.
경제를 유럽 선진국을 능가할 만큼 다원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주요 에너지와 전략산업의 국영화를 통해 발전 속도를 내려는 푸틴의 경제 개발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유사하다.
실제로 푸틴은 1990년 레닌그라드 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의 국제문제보좌관 시절 이석배(李石培) 주(駐)카자흐스탄 공사에게 “박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든 다른 언어로 쓰였든 모두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푸틴은 “어찌나 허름한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은 곳에 살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래서 가난을 딛고 국부(國富)를 일궈낸 박 전 대통령이 유독 인상 깊었을지 모른다.
푸틴은 경제력을 발판으로 과거 소련 제국이 누린 군사대국의 위상까지 되살리려 한다.
전략 핵 잠수함은 물론이고, 초음속 토폴-M 미사일, 불라바 미사일 등 첨단 무기들까지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맞서 중국·인도와 합동군사 훈련을 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러시아 주도의 집단 안보조약기구로 탄탄히 묶으려 한다.
영화 속 슈워제네거는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한눈 한번 팔지 않는다. 푸틴도 비슷하다.
“권위주의 정치로 러시아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서방의 비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난 7월 G8 정상회담 때 부시 대통령이 러시아 민주주의를 비판하자, 푸틴은 “우리는 이라크가 겪는 식의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푸틴은 의뭉하다. 한때 ‘블랙박스(blackbox)’라고도 불렸다.
2000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기 전까지 활동이 베일에 가려 있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만큼 의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어떤 포석으로 후계 구도를 짜고 있는지는 러시아 언론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젊고 유능한 지도자가 리더십을 이어받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일단 후계자를 내세우고 나서 4년 뒤 다시 출마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푸틴의 2007년은 신(新)러시아 제국 건설을 매듭짓고, 그 바통을 후임에게 넘기는 해이다.
고비 고비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러시아와 세계정세가 출렁일 것이다.
요즘 푸틴은 평균 밤 10시까지 크렘린에서 집무를 보고 새벽 1~2시가 돼야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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