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그린/호주 수도특별지역 선거관리위원장

전자투표제(e-voting system)의 ‘설계사’로 유명한 필립 그린(사진) 호주 수도특별지역(ACT) 선거관리위원장이 지난 16일 내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08년 총선 전자투표제 전면도입을 목표로 17~18일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 참석한 그는 호주의 앞선 전자투표 경험을 소개했다. 호주는 수도 캔버라가 속한 수도특별지역(ACT)의 의회 선거가 2001년 처음으로 전자투표방식을 채택한 이래 2004년에도 계속해 왔다. 그는 “한국이 전자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호주의 경험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병근기자 bkjeon@chosun.com

[조선사설];전자투표 도입, 민주주의 근본정신에서 살펴야 
  
중앙선관위가 2008년 총선부터 전자투표제를 전면 도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모니터 화면에서 후보를 선택하는 전자투표기를 이용해 유권자가 전국 어느 투표소에서나 투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유권자가 아예 투표소까지 가지 않고 PC, 휴대폰, PDA 등을 이용해 인터넷으로 투표하는 방식도 2008년부터는 장애인, 해외 거주자 등을 대상으로 우선 실시되고 2012년부터는 희망하는 모든 유권자들이 이용할 수 있다.

당분간 종이투표 방식도 병행한다지만 전자투표가 실시되면 선거, 투표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선관위는 정해진 투표소에서만 투표하는 현행 방식에 비해 투표율이 높아지고 투·개표 관리비용도 절반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방식의 혁명을 선관위의 말대로 장밋빛으로만 그릴 수는 없다. 국회라는 작은 무대에서조차 전자투표 방식이 채용되기까지 얼마만한 진통이 있었는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가 보기보다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투·개표 과정에서 만에 하나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 또는 투·개표 조작 시비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전자투표, 그중에서도 인터넷 투표는 비밀투표 원칙과 배치된다. 유권자가 어떤 투표행위를 했는지가 기록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이걸 감수한다 해도 그 기록을 누가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사전 검토가 있어야 한다.

종이투표에서 인터넷 투표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히 투표 용구가 바뀐다는 것 이상의 변화를 내포한다. 인터넷 투표가 전면 도입되면, 수시로 국정 현안을 국민투표나 그에 준하는 여론조사에 부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유권자들로부터 그런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이 경우 직접 민주주의 요소가 폭넓게 확대되는 대신 대의 민주주의제는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없었던 기술적 한계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의 위험성을 줄여보려는 정치철학적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정치가 내보이고 있는 근본적 취약점도 ‘직접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대의성(代議性)의 혼란’에서 오는 것이란 점도 바로 보아야 한다.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자투표 방식이 아직 부분적인 실험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전자투표의 전면도입은 선거관리위원회가 투·개표 관리의 편의성을 높이려는 단순한 기술적 차원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정치권과 학계가 전자투표 나아가 전자민주주의의 의미와 파장에 대해 충분한 사전 검토와 논의를 한 뒤에 신중히 결정할 문제다.
발행일 : 2005-01-19